Show notes
이 방송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등단 5년 미만의 신진작가들을 지원육성하는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에 선정된 작가를 초대,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눠보는 팟캐스트 입니다.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는 만 35세 미만의 차세대 예술가의 발굴과 창작 역량을 향상 시키기 위해 새로운 창작주제 및 소재의 조사연구와 창작화 과정을 지원하고 기존의 차세대 예술가육성사업(AYAF)와 창작아카데미사업이 통합된 사업입니다.)<이병철 시인의 시 4편>미러룸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당신과 연애한다 정면의 당신 후면의 당신 측면의 당신에게 입 맞춘다 두 개의 입이 여덟 개로 늘어난다 거울은 복리(複利)의 세계, 감각의 무중력 공간 거울에 갇힌 우리는 거울 밖에 있다 그것은 마치 얼음 속에서 빙폭의 바깥을 오르는 일, 오늘의 연애는 불가능의 가능성이다 거울과 거울이 겹쳐질 때 우리는 증식하고 갇힌다 우글거리는 우리가 된다 하나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분명 웃었다 그러나 네 개의 거울 속에서는 겁에 질려 있다 거울과 거울 사이에 하얀 침대가 놓여있고 침대는 우리의 알몸을 허공에 띄운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거울 바깥을 본다 또 바깥에서 속을 들여다본다 바깥은 폐쇄돼있고 속은 열려있다 나는 나만 보고 당신은 당신만 본다 눈빛들이 뜨거워질수록 당신에게선 소리도 냄새도 나지 않는다 당신과 나는 지금껏 서로의 바깥에다 그림자만 잔뜩 싸질렀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거울과 거울 사이로 전화벨 소리가 들어와 거울 속에 적막을 만든다 거울의 감정을 알기 위해 불을 끄지만 우리는 한 번도 거울 아닌 적이 없었다 거울만큼 완벽한 외도는 없다불과 빨강과 뱀입 속에서 몇 번, 계절이 바뀌어네가 늦봄을 내밀 때나는 꽃잎에 덮인 꿀벌들의 소로와벼랑 틈 숨은 폭포를 몰래 감춘다우리는 속으로만 스며드는 핏물을 붙잡고선지덩어리로 굳어지는 중이야아니, 은밀한 배꼽까지 활짝 열고진공상태의 죽음을 듣고 있는지도 모르지혀끝의 여름, 혀끝의 겨울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해?나는 모퉁이들로 우글거리는 마을이 될 거야불붙은 얼음들이 떠다니는 테트리스도 좋고그건 그렇고, 너는 정말 달다이빨 사이마다 체온계가 꽂혀있어우리는 이제 전염병 창궐한 격리병동이야비린내 나는 해동생선이야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흉한 점괘야서로가 도망 못 가게 불과 빨강과 뱀으로묶어도 묶어도 아름다운 음악처럼 풀어져버리고계절이 바뀌어도 도깨비 뿔 같은 종유석만 밀어 올리는우리는 서로 입 벌린 무덤이 되어하루 종일 먹고 뱉고 먹고 뱉고삼키지도 못하면서 죽었다가 부활하는장난, 목구멍 타들어가는 불장난만 하면서거미보다 아름답지 않은 1 거미는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는 걸 혼자 아는 나는 무당거미 무늬 속에서 길을 잃어본 적 있는 아이 나와 무당거미는 데칼코마니예요 햇빛마저 실올을 뽑아내는 여름 대낮에 나는 내 반쪽의 무늬를 찾으러 낡은 집과 숲그늘을 헤집고 다녀요 태양이 조준하는 과녁에 무당거미가 매달려 있어요 썩은 처마 아래서 구름에 목줄을 채운 채 무당거미를 쓰다듬어요 거미는 날개가 없지만 나비보다 아름다워요 무당거미 몸통에선 노란 장미가 피어나고 피에 젖은 호랑이가 하품을 해요 어떻게 거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죠? 내 반쪽의 문양이 바람에 흔들려요 거미를 델몬트 주스병에 넣어요 유리병 속에 소주를 들이붓자 알록달록한 무늬들이 소용돌이쳐요 유리병이 끈끈한 실로 가득해요 2 누구도 거미를 흉내 낼 수 없어요 날개를 떼어낸 나비 몸통을 거미 밥으로 먹여요 여자아이들이 소리를 질러요 거미보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으로 도망치려고? 끈적거리는 내 숨이 닿지 않는 세상으로?저승사자 놀이를 하던 대낮이것은 돋보기로 개미를 태우던 날의 일기다괄약근 풀린 태양이 묽은 빛을 한 무더기 싸지르던 대낮냄새와 향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들은라일락 한 움큼씩 꺾어 버리다 지루해졌다커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된 아이들의 발치로커피 알갱이 같은 개미떼가 알레그로 모데라토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악의 악보를 그리며 기어올 때저승사자 놀이를 하자!잘 익은 머리통에서 실잠자리 같은 연기가 팔랑였다구구단 너머에는 수가 없는 줄 알았기에수북이 쌓인 개미들의 주검에서 웃음소리가 났고돋보기에 고인 하늘이 찰랑거렸다우리도 죽어?묵직한 음악이 빛의 항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아이들의 목숨이 구구단을 넘지 못하리란 걸알고 있었다,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나는 그날의 놀이를 잊어버렸지만아이들은 걸어 들어갔다돋보기로 개미를 태우던 날의 일기 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