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파문_시즌3
2016 파문_시즌3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선정 작가
파문 시즌3 제1회_이병국 시인편
40 minutes Posted Dec 26, 2016 at 6:2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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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송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등단 5년 미만의 신진작가들을 지원육성하는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에 선정된 작가를 초대,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눠보는 팟캐스트 입니다.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는 만 35세 미만의 차세대 예술가의 발굴과 창작 역량을 향상 시키기 위해 새로운 창작주제 및 소재의 조사연구와 창작화 과정을 지원하고 기존의 차세대 예술가육성사업(AYAF)와 창작아카데미사업이 통합된 사업입니다.)
<이병국 시인의 시 4편>
그런 날들의 기원
1
할머니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소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일본어를 배워야 했지만 할머니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누구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아무도 일러 준 적이 없었다
사과와 배, 레몬과 자두를 꺼내 일본어로 그 이름을 물었을 때 할머니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가끔 제상에 올랐다가 어른들 입으로 사라져 버린 과일과 여적 한 번도 본 적 없는 과일의 이름은 언문으로도 몰랐다
2
배롱나무 뒤로 하고 아버지와 딸이 나란했고 어머니와 아들이 소복이 쌓였다 하얗게 다린 주름이 매끈했고 간지럼을 타듯 검은 교복은 어색했다 달라 같은 얼굴이었다
뽀얀 안개에 묻힌 꽃이 제법 향기로웠다 기웃한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바랜 실선이 곁을 그었다 무명 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사뿐 내려앉은 그림자가 짙었다
3
프리마켓을 돌아다닐 때마다 시간을 길어왔다 하나 둘 들쳐보노라면 할머니가 읊조리던 날들을 어렴풋이 느끼곤 했다
그리 멀지 않은 위안을 아무도 일러준 적이 없었지만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괜찮았다 할머니의 한쪽 뺨 가까이 하늘을 올려다 본 날 할머니는 무성한 기원을 밥처럼 퍼 주었다
토렴
따뜻한 한 그릇을 먹고 싶어 식당에 들렀습니다.
오랜 시간 앉아 그늘을 쐽니다.
반복되는 손짓이 무거워
한발을 다른 발로 지그시 밟습니다.
떠내려간 시간으로
오늘을 건져냅니다.
맑은 바탕이 버텨낸 마음을
거푸 뒤집습니다.
주름진 꿈을 바라는 것도
엊그제 놓고 간 기대를 내일이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한손이 다른 손을 감당하는
소용이 먼저입니다.
식탁 위에 놓인 일과처럼
이해를 구한 적은 없습니다. 한 숟갈 퍼 넣은
다락처럼 허리를 펴 본 적도 없습니다.
절반쯤 뻗은 다리가
서로의 품으로 교차할 때
접힌 세계처럼 허기가 져
하루가 집니다.
그렇게 이번 신발도 구멍입니다.
새끼발가락부터 닳아
밖으로 나가려는 평범과
가둬두려는 일상이 부딪칩니다.
그럴 때마다
뒤꿈치에 굳은살이 박이고
신발 뒤축이 닳습니다.
돈을 내려고 주머니를 뒤지니 생활뿐입니다.
만감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듯
담은 만큼 퍼내라 합니다.
지우고 난 후여도
우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시시한 이전을 다시 처음으로 돌립니다.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 했습니다.
올드하면 안 되나요
나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좋아해요.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절정과 결말은 뻔할수록 흥미진진하죠. 우리는 핫플레이스로 들어가요. 종유석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엑스트라 죽순이만도 못해요. 정신 병리학의 은유를 띄우면 더욱 흥분하지요. 난 금방 사정하고 말거예요. 제발, 제발이라고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요. 두 손을 당신의 위기에 올려놓겠어요. 뻔질나게 그려내는 짝퉁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숭고한 체험을 선사할게요. 인사하세요. 우리는 갓 태어났어요. 킬킬 웃어도 나는 죽지 않아요. 총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너는 달아나겠지만 자일리톨 껌에 걸려 되돌아올 거잖아요.
도대체가 일방통행이라니까요. 좌회전을 무시하면 결말이 두려워해요. 발바닥에서 마우스를 뽑아내면 너는 올드한 사람. 나는 꼬리가 짧아요. 고양이처럼 길어지고 싶은데 담벼락 위에서 우아한 걸음마를 사족처럼 달고 있지요. 화룡점정이라는 말도 있지만 점 하나 찍자고 말을 늘일 건 없잖아요. 나는 펑크한 감각으로 고철을 가득 싣고 달려요. 리어카를 끄는 당신은 리어왕. 내가 당신을 죽여줄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일 키로에 팔백 원이라니 말이나 되나요. 나는 일 키로에 십만 구천 원짜리 옷을 흘리고 다니는데 말이죠. 갈색 스니커즈를 신은 남자를 찾으면 일 키로에 팔천 원을 준다는데 어딜가야 날계란을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올백을 맞았어요.
삼단 구성은 글의 기본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인다면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볼 거예요. 입꼬리가 올라간 눈동자가 손바닥 위에서 굴러다니죠. 조커는 조카도 비커도 될 수 있으니 신비의 영약 한 알만 있으면 근두운을 타고 구성의 가장자리를 엣지 있게 거닐겠어요. 이건 은유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저 언어로 시를 빻는 거예요. 맷돌이 아닌 걸 다행으로 아는 오빠가 널 벗겨내려고 하지요. 맛없는 빵을 언니한테 들켜서 우회전을 해요. 신호등 앞에서 안전한 사정을 이야기해요. 껌종이로 감싸면 제삼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질 거예요. 그러니 손 흔들어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들 하셨어요. 의자를 마련했으니 이제 그만 죽으세요.
넉넉한 요란
뒤꿈치가 닳았다
그만큼 줄어든 키가
하루씩
하얗게 새었다
침묵을 매만지며
발을 기웠다
아프지 않아 익숙했다
무던한 한낮의
그림자만큼
나는 발끝을 나란히 하고
매일을 의욕했다